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츠토야 유미 (문단 편집) ==== 1973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aramelmama1.jpg|width=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aramelmama.jpg|width=300%]]}}} || || {{{#ffffff '''왼쪽부터 [[호소노 하루오미|{{{#ffffff 호소노 하루오미}}}]], 마츠토야 마사타카, [[스즈키 시게루|{{{#ffffff 스즈키 시게루}}}]], 하야시 타츠오''' }}} || 이번 앨범 프로듀서는 [[호소노 하루오미]]가 맡았다. 당시 호소노 하루오미와 [[스즈키 시게루]]가 결성한 캐러멜 마마[* 틴 팬 앨리의 전 밴드명]가 [[세션]]을 맡았는데 유미는 이미 결정된 일인가요라며 맥 빠진 얼굴을 했다. 그녀는 브리티시 록을 좋아했고 캐러멜 마마가 하는 웨스트 코스트 록은 촌스러워서 싫었다. 무라이는 퀄리티 있는 앨범을 만들기 위해서라며 결정이 끝났다고 그녀에게 재차 고했다고 한다. 녹음이 시작되기 전, 그녀는 캐러멜 마마 멤버 네 사람과 [[면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때가 후에 [[남편]]이 되는 마츠토야 마사타카와의 첫 [[만남]]이다. 1973년 초, 그녀의 대학교 1학년 시절이 끝나갈 무렵부터 녹음이 개시되었다. 캐러멜 마마 멤버들은 각자의 파트에서 저마다 개성을 발휘했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녹음 풍경이 바로 무라이가 그린 [[캐롤 킹]]의 자유로운 라이브 세션과도 같았다. 이윽고 그녀도 캐러멜 마마 사운드에 익숙해졌고 점점 자신의 목소리와 맞는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융합되어갔지만, 얼마 안 가 큰 난항을 겪게 된다. 세션 녹음은 원만히 끝나가는데 그녀의 [[보컬리스트|보컬]] 문제는 전혀 진전되지 않았던 것. 음반은 영원히 남는 것이니까 완벽에 가깝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무라이의 주장이 있어, 그의 책임을 맡은 아리가 츠네오가 유미를 매우 엄격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발성(음악)|발성]]법, 특히 [[음정]]이 어긋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세 테이크 정도 녹음하고 그중에서 좋은 것만 골라 테이프를 연결했다. 그녀는 그렇게 해서는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라며 스튜디오 한구석에서 울기도 했다고 한다. 계속해서 녹음을 반복하는 아리가 츠네오를 보며 마츠토야 마사타카는 아라이씨 특유의 논 비브라토[* 데뷔 싱글 返事はいらない(답장은 필요없어)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문장마다 비브라토를 과하게 늘려 마무리하는 창법을 가지고 있었다.]는 가수로서의 장점이니 그대로 두는 게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몇 번이고 녹음을 반복하다 보면 감정도 없어질뿐더러 깊이도 없어진다. 가수가 가지고 있는 정서를 억지로 떼어내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옹호했지만, 아리가 츠네오는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앨범은 계속 남는 거니까 똑바로 불러주세요.라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라이도 엔지니어인 요시자와 노리오에게 믹스의 밸런스가 안 맞네 등으로 재작업을 요구했고 급기야 제작 회의에서 '''완벽한 것이 마무리 될 때까지 아라이 유미의 앨범을 내지 않겠다.'''라고 단언하면서 크게 지연되어 버린 스케줄은, 완성일을 정하지 않기로 했다. 자체 스튜디오를 사용하다 보니 비용적인 측면에서는 여유가 있었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에 빠져버린 녹음에 불안해하는 직원들도 많았다고 한다. 사실 무라이가 이렇게까지 완벽을 추구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알파 소속인 가로[* 1970년부터 1976년까지 활동한 일본의 포크 록 그룹.]의 인기가 식고 있던 데다가 붉은 새[* 1969년부터 1974년까지 활동한 일본의 포크 록 그룹. 멤버들이 해체하게 되면서 각각 종이풍선, 하이 파이 세트, 허밍 버드로 나뉘어졌다.]까지 해체설이 나돌았던 것이었다. 누군가를 새로운 스타로 만들기 위해 아라이 유미라는 도박에 전 재산을 걸고 있었다. 많은 난관과 우여곡절 끝에 1973년 가을, 모든 녹음을 마쳤다. 1년에 걸쳐 만들어진 비행기구름은 발매 예정이 두 번 정도 늦춰진 11월 20일 도시바 EMI에서 발매했다. 무라이는 곡의 신선함과 캐러멜 마마 밴드의 뛰어난 세션을 도시바 측에 강조했으나 쭉 가요계의 길을 걸어온 베테랑 담당자는 가사의 난해함과 가창력을 문제 삼았다. 결국 제시된 프레스는 3,000장. 장르가 너무나도 새로운 쪽에 속했는지 어느 레코드점에서도 주문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콘서트]]였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거의 없던 것이다.[* 1월과 11월에 작은 공연에 출연해 작게 2~3번 불러본 것이 전부.]가수로서 익숙해지려면 기회를 밟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달인 12월 26일, 무라이 쿠니히코 슈퍼세션 'Introducing Yumi Arai'가 열렸다. 가로와 무슈 카마야츠 등의 응원 출연을 얻어 장소는 시부야 파르코 세이부 극장으로 정해졌다. 업계 관계자들에게 선보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티켓 판매에는 힘을 쓰지 않았다. 무라이가 말하길, 이날 팔린 입장권은 단 2장 뿐이라고 한다. 그날 밤, 그녀가 무대에 등장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자, 객석은 술렁거렸다. 당시 싱어송라이터들은 [[청바지]]에 [[티셔츠]]가 정석이었는데 그녀는 세련된 재질인 타카라젠느의 새하얀 정장 차림이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그녀를 아끼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카와조에 카지코가 [[생 로랑]]의 의상을 준비해 준 것.[* 카와조에는 평소에도 이 아이는 커서 스타가 될 거야.라며 모두에게 유미의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날 백밴드는 마츠토야 마사타카가 결성한 '파파 레몬'이었는데 마사타카 회상에 의하면 첫 데뷔 무대는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다섯 곡을 부를 예정이었지만 첫 곡인 비행기구름을 부르다가 도중에 막혀 이어진 나머지 네 곡이 모두 밴드만의 연주가 되고 말았다. 가사를 잊어버린 것일까. 감정이 북받쳤는지 계속 울고 있었다.[* 파파 레몬의 멤버 히라노 하지메는 저서 '나의 음악 이야기'에 유미와 처음 만났을 때가 담겨 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무슨 [[아줌마]]처럼 싹싹해서 부담스럽지 않게 사람을 대했다. [[모델]] 같은 풍모와 말투의 차이가 인상적이었다."라고 말했을 만큼 평소 모습은 쾌활하고 밝은 사람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